주보성인


 성 정하상(바오로, 회장, 1795~1839)은  남인 양반의 유서 깊은 가문의 후예로 1795년, 경기도 양근군의 마현 [마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801년 4월 8일에 순교한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1839년 11월 23일 순교한 성녀 유 체칠리아의 아들이며 같은 해 순교한 성녀 정정혜(엘리사벳)의 오빠이다. 그의 형인 정철상(가롤로)도 부친과 함께 1801년에 순교하였는데, 이로써 그의 가족은 거의 다 순교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상사안에서 유명한 정약전, 정약용 요한은 그의 백부와 숙부이다. 

 

 1801년 한국 천주교 창설에 공이 컸으며, 한글 교리서인 <주교요지>를 저술하였던 그의 부친 정약종이 사학죄인으로 몰려 처형되었기 때문에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이 때 정하상은 겨우 일곱 살로 그의 모친과 누이 정 엘리사벳(5세)과 함께 풀려났으나, 가산을 적몰 당했기 때문에 호구지책도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들은 우선 고향 마현으로 내려가 이미 귀양가고 없었던 숙부 정약용(다산)의 집에서 갖은 고생 속에 살았다. 그러나 정하상은 이러한 극한 상황의 어려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의 모친으로부터 기도 및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배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외교인에게 항상 둘러싸여 살고 있었으면서도 대단히 어려운 천주교 본분을 지켜 나갈 수 있었다. 나이 스무 살이 되었을 떼 , 정하상은 모친과 누이를 고향에 남겨두고 혼자 서울로 올라와 여교우인 조증이(바르바라)의 집에 머물면서 목자 없이 박해를 당하고 있던 조선 천주교회의 재건에 대해서 궁리했다. 


 이에 그는 안일한 생활보다 한국에 복음을 전하하기 위하여 기반을 닦아야 된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주야로 기도하면서, 선교사를 모셔 오는 일과 조선 교회의 재건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래서 그는 함경도에 귀양 가 있는 한학자 조동섬(유스티아노)에게 가서 한문 공부를 한 후, 한국 교회 재건에 헌신한다는 결심을 굳히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1816년, 양반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노복의 신분을 취하여 어느 역관의 하인이 되어 북경에 가서 북경주교에게 조선에 성직자을 보내 주실 것을 청하는 한편 그동안 박해로 두절되었던 북경 교회와의 연락을 다시 부활시키려고 하엿다. 그는 북경에서 정식으로 영세와 견진 성사 등 성사를 다 받고 성체를 영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에서는 북경 주교의 여러 가지 어려운 형편 때문에 실제의 목적이었던 선교사 파견은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하상은 실망하지 않고 북경 왕래을 계속하였으며, 결국 다섯 번째로 북경에 갔던 1817년 경에 북경 주교로부터 선교서 파견의 약속을 받고 귀국할 수 있었다. 이에 그는 약속한 시기에 선교사를 맞이하기 위하여 변문까지 갔으나. 기다리던 선교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조선에 선교사로 임명된 심 신부가 파견 도중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듬해 정하상은 조금 더 조직적으로 동지를 교합, 새로 입교한 유진길(아우구스티노)과 조신철(가롤로), 그리고 강진에 유배 가 있던 대학자이며 그의 삼촌인 정약용의 자문과 후원을 얻어 다시 성직자 영입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로마 교황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한편, 북경 주교에게도 다시 서신을 보내게 되었다. 그들의 이와 같은 정성과 열심은 로마 교황청에까지 전달되어 마침내 조선 교회는 파리 외방전교회에 위임이 되었으며, 동시에 조선에 독립된 교구가 설정됐던 것이다. 이 때부터 조선에 선교사가 입국하게 되었으며, 천주교 부흥의 기틀도 마련되어 갔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마다 정하상은 의주 변문까지 가서 그들을 맞아들였는데, 그이 북경 왕래는 무려 아홉 차례나 되었으며, 의주 변문까지는 열한 차례를 왕복하였다. 그리하여 1834년 중인 유방제 신부를, 1835년에는 나 모방 신부를 맞아들이고, 1836년에는 정 샤스탕 신부를, 1837년에는 범 엥베르 주교를 맞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주교인 범 엥베르 주교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직접 복사직을 수행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범 엥베르 주교는 그의 성실함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성직자로 만들기 위해 주교 자신이 직접 라틴어와 신학을 강의하며 공부를 시키기도 하였다. 그 무렵 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정하상은 주교를 수원 지방으로 피신시킨 후 주교 댁을 지키며 순교의 때를 기다렸다. 

  

 이 때 그는 체포되어 법정에 나갈 경우 조정 관리들에게 제출할 목적으로 천주교 변호의 글인 < 상재상서, 재상에게 올리는 글>를 작성하였던 바, 이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호교론인 것이다. 

 

 이 내용 안에서, 그는 조선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부당성을 유려한 문장으로 논박했기 대문에 극반대파까지도 이 글에 대하여 감탄하였다고 한다. 

  

 그는 마침내 1839년 7월 11일(음력 6월 1일), 모친과 누이와 함께 체포, 압송되었다. 의금부 추국에서는 그가 소위 양인을 데려온 역적으로서, 또는 열성적인 교회 지도자로서, 조선교회 활동의 주역이었으므로, 유진길 등과 함께 그들에 대한 대단히 처참한 고문과 형을 내렸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교리를 설명하였고 성직자를 변호하면서 이 시련을 이겨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1839년 9월 22일에 서양인을 나라 안에 끌어들인 모반죄와 부도의 죄명으로, 유진길 등과 함께 서서문 밖에서 참수 되어 순교의 영광을 받고 한국 정신사의 빛이 되었으니, 그 때 그의 나이 44였다.

  

 이 서소문 밖 형장은 바로 그의 부친이 같은 죄목으로 순교의 월계환을 받았던 바로 그 장소였다. 


 한국 교회사상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 남인 학자들이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자체적인 활동으로 조선 교회를 창립한 주역들이라고 한다면 정하상은 바록 그분들의 뒤를 이어 그 시기에 박해로 마멸되어 가던 조선교회를 재건시키고 교구 설정을 성립시켜 한국인 스스로 교회를 부흥시킴으로써 당시 조선교회를 튼튼한 반석위에 올려놓았던  주역이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조선시대의 위대한 종교가이며 순교자였던 것이다.